1968년 손미(미라이) 학살 캡션: 갓난아이부터 70살 노인까지 한 가족이 한날 목숨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이 해방되었다. 식민지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따라 선거를 통해 단일 정부를 구성하려 했지만, 미국이 도미노 이론(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차례로 공산화 될 거라는 이론)을 들어 베트남 독립에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다. 초반에는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이 우세했으나 1968년 1월, 북베트남의 ‘구정공세’로 전략적 요지와 주요 시설을 점령당하는 타격을 입는다. 이에 미군은 미라이 촌락이 포함되어 있는 다수의 피점령 지구를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친다. 미 육군 23 보병사단, 11여단, 20 보병 연대, 1대대, 찰리 중대(이하 찰리 중대)는 이러한 반격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모든 집에 불을 지르고 모든 식량을 없애며 우물을 폐쇄하라”와 같은 명령을 받은 찰리중대는 1968년 3월 16일, 미라이 촌락에 진입하지만 적군을 전혀 찾지 못한다. 이후 미군들은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임산부와 어린이, 56개월 미만 유아를 포함되어 있는 비무장 민간인들 사살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504명의 마을 주민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미군부가 은폐하여 알려지지 않다가 1년 후 언론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사살 명령을 내린 소대장을 제외한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오직 소대장만이 종신형을 받았다가 그마저도 3년간의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1968년/ 하미 학살
캡션: 하미 마을의 추모 비문에는 당시 사망한 이들의 이름과 나이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첫돌도 못 넘긴 아이도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4년 9월,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제1이동외과병원의 장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으로 구성된 비전투원 140명을 베트남에 파견한다. 1965년 2월에는 전재복구를 위한 공병부대 및 경비 병력으로 이루어진 비둘기 부대, 10월 이후에는 해병 청룡부대를 비롯한 전투부대가 파견된다. 북베트남의 구정공세 이후 다수의 피점령지역을 되찾기 위한 반격작전이 한창이던 1968년 2월, 청룡부대는 베트남 남중부 지방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2월 25일에 하미마을에 진입한 청룡부대는 마을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이후 청룡부대는 마을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2시간 만에 135명의 주민이 죽었으며 대부분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다. 몇몇 생존자들은 희생된 사람들을 구덩이에 묻어 무덤을 만들었지만, 다음날 한국군은 불도저를 가져와 무덤과 시신을 훼손한다. 이후 하미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기억하기 위해 학살의 경과를 적은 추모 비문을 세운다. 2000년에 한국의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하며 위령비를 세운다. 하지만 위령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추모 비문에 적힌 내용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마을사람들의 반대로 추모 비문은 지워지지 않았으나, 그 내용은 연꽃 그림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덧씌워진 상태이다.
1995년 스레브레니차 학살
캡션: 희생자들이 묻힌 집단무덤의 모습. 엎드려 기도하는 여성이 보인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유럽 발칸반도에 있는 나라로 이슬람교의 보스니아인, 정교회의 세르비아인 그리고 카톨릭의 크로아티아인 등 3개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1년 10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유고슬라이비아에 남기를 원한 세르비아 계는 보스니아 계가 주도한 독립을 반대하였지만 1992년 4월에 EU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게 된다. 이에 세르비아 계는 자치 공화국을 건립하고 보스니아 계와의 전쟁에 돌입한다. 이 내전 동안 많은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으로부터 살해되거나 강제이주 당했다. 특히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병대에 의한 폭력이 심각했는데, 이들은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아녀자들을 강간하고 무차별적인 살상을 하였다. 내전의 막바지에 이른 1995년 7월, 세르비아는 유엔이 ‘안전지역’으로 선포한 피난민 거주지인 스레브레니차를 침공한다. 당시 스레브레니차에는 세르비아 인의 약탈과 살상을 피해 약 4만 명의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계 보스니아 인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이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후 보스니아 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해된 보스니아 인들은 대부분 15~50세의 남성들이었지만, 여성과 유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약 8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유럽에서 전범에게 집단학살죄가 적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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