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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예영준의 차이 나는 차이나] ‘비정성시’ 비극의 씨앗, 2·28 사건 70년 … 갈라지는 대만
작성일 2017-03-05 오후 2:23:41 조회수 2211

 

차이잉원 대만 총통(오른쪽)이 23일 해외 거주 중인 2·28사건 피해자의 유족들을 타이베이로 초청해 친필 서명한 그림을 선물하고 있다. 그림에는 “겨울 추위가 다 하니 위산(玉山·대만에서 가장 높은 산)의 눈이 녹는다”고 적혀있다. [대만 총통부 제공]

차이잉원 대만 총통(오른쪽)이 23일 해외 거주 중인 2·28사건 피해자의 유족들을 타이베이로 초청해 친필 서명한 그림을 선물하고 있다. 그림에는 “겨울 추위가 다 하니 위산(玉山·대만에서 가장 높은 산)의 눈이 녹는다”고 적혀있다. [대만 총통부 제공]?

 

 

올해로 70주년을 맞는 2·28 사건은 대만 현대사가 낳은 최대의 비극이다. 일제가 물러난 뒤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의 군·경이 1947년 차별대우에 반발한 대만 주민들의 시위와 파업을 유혈 진압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희생자 수만 2만8000명에 이른다. 국민당 정부의 전매국 단속반원이 밀수 담배를 팔던 노점상 여인을 구타한 게 발단이 됐다. 대만 전역의 시위로 이어졌고 군·경은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며 무차별 진압했다. 대만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의 뿌리깊은 갈등의 근원도 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성인은 명(明)나라때부터 대만에 건너와 살던 중국계 후손이고 외성인은 1940년대 대륙에서 패퇴한 국민당과 함께 건너온 중국계를 말한다. 198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허우샤오셴(候孝賢)감독의 ‘비정성시’는 2·28 사건을 처음 영화로 다룬 작품이다.

 

  

차별에 반발해 시위 나선 대만인들
국민당 유혈진압, 2만8000명 희생
2000년 민주화 전까지 봉인된 역사
민진당 출신 차이잉원 “진상 밝힐 것”
국민당 “과거 잊고 화합해야” 맞대응
중국 “공산당 활약한 해방투쟁” 딴죽

하지만 이 사건은 대만 민주화 이전까지 철저하게 봉인된 역사였다. 장기 계엄 통치하의 대만에서 2·28 사건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그러다 2000년 민진당이 처음으로 집권하면서 비로소 사건이 재조명되고 국가기념일로까지 지정됐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비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자 수가 많고 상당한 시간이 흐릇 탓에 진상규명은 아직도 미흡한 상황이다.

 

 

  

대만 2·28 사건

대만 2·28 사건

 

 

 

대만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본성인들은 진상규명부터 철저하게 한 뒤 용서와 화해의 단계로 들어가겠다는 입장이다. 과거와 철저히 단절한 뒤 ‘대만인에 의한 대만’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민진당은 그런 세력들의 지지를 업고 집권에 성공했다. 민진당 출신인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23일 2·28 사건 유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진상(규명)없이 화해도 없다”며 “이는 내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다짐했다. 사건 당시 대만의 행정장관이 본토의 장제스(蔣介石)에게 군대 출동을 요청하며 보낸 전문도 이날 처음 공개됐다. 70주년 당일인 28일에는 대대적인 추도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70주년을 앞두고 수난을 겪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장제스다. 곳곳에서 그의 동상이 철거되거나 ‘2·28의 원흉’이란 글씨로 훼손되고 있다. 대만 토착민과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볼 때 국민당과 그 통치자 장제스는 자신들을 지배하러 온 외부세력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국부 쑨원(孫文)의 뜻을 계승해 중화민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지도자로 추앙받던 장제스의 위상은 대만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만판 ‘역사 바로세우기’로 부침을 겪고 있다. 대만 수도 타이베이(臺北) 한복판에 있는 중정(中正·장제스의 본명)기념당은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시절 ‘대만민주기념관’으로 바뀌었다.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은 이를 다시 원상복구시켰지만 기념당 앞 광장의 현판은 ‘대중지정(大中至正)’에서 ‘자유광장’으로 바뀐 상태 그대로다.


 

1947년 2월 28일 타이베이의 담배 전매총국 앞에서 본성인(조기 이주자)들이 집단 시위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1947년 2월 28일 타이베이의 담배 전매총국 앞에서 본성인(조기 이주자)들이 집단 시위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캡처]

 

 

국민당에게 2·28 사건은 아킬레스 건이다. 사건을 부정할 수 없는 국민당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화합해 나가자고 호소할 뿐이다. 마 전 총통도 추도식에 참석해 헌화하는 걸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대만을 일군 뿌리인 장제스의 부정으로 이어지는 건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국민당에 우호적인 논조의 일간지 중국시보는 26일 “국민당은 외래 정권이 아니다”며 동상 파괴운동을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이처럼 대만 여론은 2·28 사건을 둘러싸고 반분(半分)된 상태다.

 

 

대만 해협 건너편의 중국 공산당은 2·28 사건에 관한 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만약 2·28 사건을 대대적으로 평가하고 국민당 정권의 책임을 강조하면 본의 아니게 민진당과 손을 잡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부인하는 민진당과의 합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만독립 세력이 2·28사건을 계기로 중국 대륙으로부터 받은 압박과 피해를 강조함에 따라 중국과의 단절 여론이 높아지는 걸 방치할 순 없다. 더구나 ‘대만은 중국의 일부’란 입장에서도 2·28 사건 70주년에 나몰라라 할 순 없는 일이다. 중국 당국이 23일 린원이(林文?)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2·28 사건 기념식을 거행한 건 바로 이런 고민의 산물이다. 이 자리에서 린 부주석은 “2·28 봉기는 압제에 반대하는 전 중국 인민 해방투쟁의 일환”이라며 “봉기 과정에서 중국 공산당과 당원들이 큰 활약을 했다”고 주장을 펼쳤다. 그는 중국 당국의 본심을 드러내는 발언도 했다. “2·28 봉기를 대만독립분자들이 왜곡하고 있다”며 “대만은 이를 멈추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라”고 촉구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대만인들은 거부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24일 중국의 인터넷에는 대만의 2·28 기념 평화공원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 수십개가 게양된 사진이 올라왔다. 누군가가 공원 관리소의 눈을 피해 내건 깃발이었다. 중국 인터넷에는 “2·28 봉기에 공산당의 역할이 컸다”는 설명이 붙었지만 대만 인터넷에는 “구역질 난다”는 등의 댓글이 달렸다.
 


2·28 사건 70주년을 맞는 풍경은 이토록 다르다. 대만의 집권당과 야당, 그리고 대륙의 공산당의 해석은 제각각이다. 대만 내부의 분열 뿐 아니라 양안(兩岸) 갈등도 더 깊어지는 모양새다. 진정한 화해를 통해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갈등과 분열과 반목을 확대재생산할 뿐이란 사실이 2·28 사건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예영준의 차이 나는 차이나] ‘비정성시’ 비극의 씨앗, 2·28 사건 70년 … 갈라지는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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