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시민단체들이 지난 27일 오후 타이베이시에서 ‘2·28 70주년 기념행동’ 집회를 연 뒤 거리행진에 나서고 있다.
“화해는 진실 위에 구축돼야 합니다.”
지난달 28일 오후 2시 대만 타이베이시 2·28평화공원에서 열린 2·28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차이잉원 총통은 2·28사건 희생자 유족들에게 학살에 대한 책임 규명을 약속했다. 촉촉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희생자 유족과 시민 1500여명이 참가했다. ‘대만 독립’을 요구하는 단체들의 목소리도 넘쳐났다. 이날 하루 대만 전역의 20여개 도시에서 2·28 기념집회가 열렸다.
차이 총통은 기념식에서 2·28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입법원에서 ‘이행기의 정의 조례 초안’(과거청산법)을 우선 처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다’는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 화해는 진상규명을 전제로 해야 한다”며 “정부기관에 있는 2·28이나 계엄 시기 때에 관한 자백서, 기록, 판결서, 공문서 등을 모두 찾아내겠다. 이는 ‘과거청산조사보고서’의 바탕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만 2·28사건 70주년을 맞아 타이베이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음악회와 전시회, 유적지 순례, 학술심포지엄 등 40여개의 크고 작은 행사가 진행됐다. 2월28일은 국가공휴일이다. 2·28평화공원 안에 있는 기념관에는 2·28사건의 진상을 알려는 대만인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대만판 제주4·3사건’이라 불리는 ‘대만 2·28사건’ 발생 70주년을 맞은 대만은 기억투쟁의 현장이었다.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시 타이핑정 천마다방 부근에서 전매국 단속반원들이 밀수 담배를 팔던 한 여인을 총신으로 구타하고, 지나가던 청년이 이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다음날 분노한 민중들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경찰서로 행진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은 곧바로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해 무력 진압에 나서 3개월 사이에 수많은 대만인을 학살했다. 1992년 학계 연구를 바탕으로 대만 행정원이 펴낸 보고서 초안에는 1만~2만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최종본에서는 이런 추정치가 삭제됐다. 이 사건 이후 국민당 정권의 군사독재는 1987년까지 계엄령으로 이어졌고, 1950년대 이후 ‘백색테러’ 시기 3천여명이 희생되고 4천여명이 투옥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의 시민단체들이 27일 오후 타이베이 시내에서 ‘2·28 70주년 기념행동’ 집회를 연 뒤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들고 있는 흰 천은 2·28사건 당시 실종자들을 기리는 의식이다.
대만2·28사건은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인 ‘3·1사건’과 닮았다. 2·28사건 다음날인 47년 3월1일 한반도 제주에선 3·1절 기념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제주시 관덕정 광장 부근을 거리행진하다 경찰의 발포로 이를 구경하던 초등학생 등 6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미군정 경찰은 책임자 처벌을 하지 않고 오히려 강경대응함으로써 이듬해 제주4·3사건의 도화선이 됐다.
“정부는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27일 오후 2시 대만 타이베이시 다퉁구 일신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열린 ‘2·28 70주년 기념행동’ 집회에서 만난 레오 리(45)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뉴저지에 사는 그는 “2·28사건은 금기된 역사였다. 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도 조금씩 얘기할 뿐 2·28사건에 대해 말씀하기를 꺼려했다. 이제는 사건의 전모를 어느 정도 알게 됐다”며 “정부는 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우리는 용서할 자세가 돼 있다”고 말했다.
집회 시작 1시간 전부터 삼삼오오 모여든 시민들 가운데는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추모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단체복을 맞춰 입고 침묵으로 항의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30여명의 대만 장로교회 목사들도 눈에 띄었다.
대만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27일 오후 대만 2·28사건의 발단이 된 타이베이시 다퉁구 천마다방 부근에 세워진 표지석을 중심으로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이날 행사를 조직한 정칭화(62) 대표는 “현재의 진실규명은 지극히 제한적”이라며 “정부는 2·28 학살에 대해 즉각 진상규명 작업을 실시해야 한다. 한국은 광주사건으로 대통령이 2명이나 구속됐지만 대만은 책임자 처벌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린쭝정 목사는 “정부가 보상금을 주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1600여명이 보상금을 받았는데 희생자 숫자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원한다”고 말했다. 재단법인 차이루이웨 문화기금회 쑤워팅 이사장은 “정부의 희생자 발표는 가짜 추정치다. 실제 희생자는 3만여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2·28은 ‘사건’이 아니라 ‘학살’이라며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만 정부는 1995년 3월 ‘2·28사건 처리 및 보상조례’가 공포된 뒤 지금까지 2300여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희생자에 견줘 적은 숫자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기념식에서 만난 인터넷매체 ’신터우커’의 커위안 기자는 “정부가 말하는 희생자 추정치보다 많을 것이다. 유족들은 보상문제에 상당한 불만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6일에는 타이베이시 228국가기념관에서 제주4·3연구소와 2·28사건기념기금회가 공동으로 마련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찬식(제주4·3연구소 이사 겸 제주학센터장) 박사와 주리시 지한문화협회 이사장 겸 대만 국립정치대 강사가 주제발표에 나섰다. 박 박사는 “2·28과 3·1사건은 하루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이들 사건이 갖는 보편성이 있다. 섬 주민들이 대륙(육지)의 통치에 맞서 봉기했다가 희생된 유사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주 이사장은 2·28과 4·3의 공통점을 “아시아에서 구현된 국제 냉전체제이며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묵인 또는 허가 아래 발생한 대학살”이라고 말했다.
대만 2·28사건 70주년을 맞은 28일 타이베이시 2·28평화공원에서 70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당과 단체들이 ‘대만독립’이라고 적힌 기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2·28사건 때 실종된 박순종(당시 34)씨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최근 피해자 인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2·28사건기금회는 이날 박씨 유족에게 600만 타이완위안(2억2200만원)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 지룽에 거주하던 박씨는 1947년 3월8일 아들의 생일상에 쓸 물건을 사러 갔다가 실종됐다. 기금회 쪽은 박씨가 국민당군에 끌려갔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이 증언자는 당시 34살이던 박씨가 주머니에 어부가 쓰는 작은 칼을 갖고 있었고,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시위 참가자로 오해받아 국민당군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고 전했다.
타이베이/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